김용복 주필
김용복 주필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일요일(18일) 둘째 딸의 결혼식을 비밀리에 치렀다. 결혼식에는 정 위원장과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성 김’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참석해 축사를 했다.

정치권에 따르면 정 위원장의 차녀는 18일 서울 모처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식은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한 가운데 조용하게 치렀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이 주변에 청첩장도 돌리지 않은 것은, 최근 당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의식해 조용히 예식을 치렀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 위원장이 자녀의 ‘극비 결혼식’을 진행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앞서 2020년 6월 정 위원장의 장녀와 당시 국민의힘 박덕흠 의원의 장남과도 극비리에 올렸다는 것이다. 

충청권 보수 중진 의원 두 사람이 사돈을 맺는 경사였지만, 정치권에 청첩하지 않고 가족과 친지만 참석한 조용한 결혼식을 올린 것은, 당시 국회 원 구성 협상이 진통을 겪고 있었던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던 시기여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정진석 의원의 핏줄을 살펴보면 그가 왜 이런 처사를 했는지 알 것이다. 

외손자들이 잘된 경우를 외손발복(外孫發福)이라고 한다. 주역에서는 음중양(陰中陽)의 논리를 가지고, 아들은 어머니 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본다. 여자 속에 들어 있는 양의 기운이 아들로 내려간다. 어머니는 친정아버지인 외할아버지의 유전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외할아버지가 출중한 인물이면 외손자가 이 기질을 유전 받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계 쪽의 유전자도 좋아야 한다.

정진석 의원이 그런 인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는 충남지사와 내무부 치안국장(현 경찰청장),국회의원,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셨던 남당(南棠) 정석모(鄭石謨 1929~2009)님이시고, 외조부는 파평윤씨 윤증 가문의 직계자손이신 윤하중님이시며, 어머니 역시 파평윤씨 윤증 가문의 딸 윤석남 여사이시다.

⯈충남 노성은 이들 파평윤씨 노종 5방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된 유서와 전통이 살아 있는 곳으로, 특히 이곳에 집중되어 분포한 종학당과 병사, 선영과 영당, 서원과 정려, 종가 고택 등은 조선시대 호서 지역 양반들의 유교 문화를 빠짐없이 접할 수 있는 문화 자원이다. 특히 종학당은 후학들이 정신문화와 유교적 사회 이념을 실천했던 역사가 쟁쟁한 곳이다. 현재 대권을 거머쥔 윤석열 대통령도 이들의 후손이며, 필자에게 틈만 나면 조상들을 자랑하고 있는 윤석구 전 우리종금 전무이사도 명재 윤증의 종원이시다.

⯈ 파평윤씨의 노성(논산) 입향은 중종대의 문신인 윤탁(尹倬)의 손자, 윤돈(尹暾, 1519~1577)이 처가가 있는 니산현(尼山縣)에 들어와 살면서 비롯되었다. 17세기에는 병사리를 근거지로 종회(宗會)를 정례적으로 열고, 종약 (宗約)을 마련하는 한편, 종학당을 건립하고 종회 운영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의전(義田)을 설치·운영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노종오방파(노종오방파)’의 형성과 ‘8거(八擧)’의 성장을 거쳐 조선 말기까지 단일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하는 성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윤황 - 윤선거 - 윤증으로 이어지는 3대라 할 수 있다.

윤증(尹拯, 1629~1714)은 미촌 윤선거(尹宣擧) 아들이자, 윤황(尹煌)의 손자로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유봉(酉峯)이다. 할아버지가 귀양이후 돌아와 이후 자손들에게 환로(宦路,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었으며, 어머니인 공주 이씨가 윤증이 7살 되던 해 병자호란 와중에 순결을 하게 된다. 윤증은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게 된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 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1660년 효종이 윤증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더욱더 학문과 훈육에 뜻을 두었다. 그의 학문이 세상에 회자되면서 많은 선비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모여들었다. 숙종대에 이르러 김수향(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윤증 집안의 학문을 맑고 깨끗하며 실천함이 매우 돈독하여 선비들이 많이 따르며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천거하자 숙종은 이에 윤증 선생에게 호조참의 벼슬을 내린다. 하지만 사양하고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에는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며 출사하기 종용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 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면서도 정승이 되었다고 해서 당시의 사람들은 백의정승이라고 불렀다. 사후 홍주의 용계서원과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주요저서로 시문집「명재유고(明齋遺稿)」가 있다.

보라, 부계와 모계의 훌륭한 핏줄을 이어받은 정진석 의원이 행하고 있는 일을. 정진석 의원은 정치적 행보가 큰 인물이다. 

그는 지난 21년 7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 관련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현장에 안철수 대표나, 역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의 주인공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이곳을 찾아 격려했으며, 당시 대권 후보 선도주자였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시위 현장을 방문해

"선거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여기에 중대한 불법이 대법원 최종 확정판결이 난 이상 여기에 대해서는 입장표명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국가의 최고책임자로서 국민께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라며 "정 의원의 말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고 저도 이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라고 힘을 실어줬다.

정 의원이나 윤석열 대통령은 정 의원의 쪽에서 볼 때 같은 파평 윤씨 윤증의 핏줄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혼사도 당의 어려움을 알고 소문 없이 치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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